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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나누어 정의할 수 없는데, 본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잡히지 않는 것은 하나로서 존재한다.
위라고 해서 더 밝지 않고, 아래라고 해서 더 어둡지 않다.
그것은 계속 이어지고, 이름 지을 수 없으며
결국 없음으로 돌아간다.

앞에서 맞이하면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면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그것이 될 수는 있다.

 

 

도덕경의 내용 중에서 가장 수수께끼같은 부분이다. 작가는 쓰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으며 결코 변하지도 않는 '영원'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라. 이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원'이라는 것이 과거에도 지금도 항상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가슴 깊이 이해하고 있는 그 영원에 대해 생각해보라. 영원의 본질은 당신과 주변의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지만 움켜쥐려고 하면 언제나 교묘히 빠져나간다.

내 생각에, 이 부분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을 가지라는 얘기인 것 같다. 눈으로 보기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그것. 멈춰있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것. 영원함의 속성을 가진 그것.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그것이 될 수는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무엇이라 정의할 순 없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이 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노자의 '무위자연','자연일체' 사상을 보여준다. 한편으론 유한한 우리가 영원함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시야를 인생 백년의 세계에 한정하기보다 영원함의 세계로 넓힌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도를 행한 옛사람은 생각이 깊고 오묘해서
그들의 지혜는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깊이를 알 수 없으니
그들을 막연하게만 묘사할 수 있다.

신중하기를 겨울에 강을 건너듯이 하고,
조심하기를 위험을 살피는 사람처럼 한다.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동굴처럼 텅 비어 있고,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유연하고,
흙탕물처럼 흐리다.

그러나 흐린 물도
고요하면 맑아지기 마련,
그 고요함에서 생명이 솟아오른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채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숨은 새싹처럼 남아 있을 수 있고,
빨리 무르익으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채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숨은 새싹처럼 남아 있을 수 있고, 빨리 무르익으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늘 허전한 곳을 채우려고 했었던 것 같다. 늘 내가 앞서 서둘러 뭔가 해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나의 불안증을 해소하기 위한 임시방편들로 삶을 채워왔던 것이다. 물론 시행착오를 겪어면서 이러면 안되겠구나 하고 터득한 지혜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매우 쓰라리고 아팠다. 어떤 이는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자꾸 과도한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못 미치면 괴로와하고 패닉에 빠진다.

이제는 내려놔야 할 때다. 이제는 삶이 맑은 날만 주기를 기도하진 말자. 비바람불고, 눈보라치는 날도 삶의 일부분이고 그것이 생명을 키우는 원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밤새 모진 비바람과 천둥에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를 생각해보라. 우리도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고, 눈보라가 치면 외투를 걸쳐입고 묵묵히 가던 길을 가면 되는 거다. 때가 이르면 화창한 날이 오고 찬란한 태양도 볼 수 있을 것을 믿으며. 이제 더이상 눈으로 보여지는 현상에 좌지우지 되지 말자. 삶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밀물과 썰물을 보며 늘 넘침이나 부족함이 없을 것을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