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책이 좋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M.Rose 2021. 10. 16. 14:58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By 무라카미 하루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이 작품은 29살에 작가가 처음 쓴 소설이다. 작가가 지금 70대 초반이고 유명한 작품도 많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하루키의 작품을 읽게 된다. 그것도 하루키의 최초 작품을.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소설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읽는 나부랭이라고 치부해 왔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하루키의 달리기에 대해 보게 되어서, 갑자기 이 작가의 작품이 보고싶어졌다. 작가의 다른 유명한 작품들도 있지만, 나는 첫 작품이 궁금해져서 골랐다. 다행히 아주 얇은 책이어서 금방 읽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글쓰기를 잘 하고 싶어하는 대학생이다. 주인공은 글에 대한 많은 것을 데릭 하트필드라는 미국 작가에게서 배웠다고 쓰고 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도대체 '데릭 하트필드'라는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기까지 했다. 재미있게도 작가가 지어낸 가상의 인물이었다.) 

 

내가 절판된 하트필드의 첫 번째 단행본을 우연히 손에 넣은 건 다리 사이에 심한 피부병을 앓던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나에게 그 책을 주었던 작은아버지는 3년 뒤에 장암으로 옴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몸의 입구와 출구에는 플라스틱 파이프를 끼운 채 끝까지 고통받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작은아버지를 보았을 때, 그는 마치 교활한 원숭이처럼 검붉은 빛깔로 심하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마치 감정이 없는 차가운 나레이터 같다. 독자들의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고, 역으로 최대한 억누름으로써 감정이 흘러나오게 하려고 의도한 것일까? 작품 전반적으로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이 모두 감정이 없는, 혹은 감정을 숨기는 덤덤한 대사를 주고 받는 것을 읽으면서, 과연 작가는 일부러 이런 설정을 의도한 것일까하는 궁금함이 들기도 했다. 만약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등장인물의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다 보여주면 어떨까? 시점의 차이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일까?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을 은근히 나타내는 양 이런 글을 붙여 놓았다.

 

데릭 하트필드는 그 방대한 작품량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나 꿈이나 사랑에 대해서 직접 얘기하는 일이 극히 드문 작가였다. 비교적 진지한(진지하다는 건 우주인이나 도깨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의미지만) 반자전적 작품인 <무지개 둘레를 한 바퀴 반>(1937년)에서 하트필드의 야유와 험담, 농담, 역설로 얼버무리며 아주 조금 자기의 속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나는 이 방에 있는 가장 신성한 책, 즉 알파벳순으로 된 전화번호부에게 진실만을 얘기할 것을 맹세한다. 인생은 텅 비었다고. 그러나 물론 구원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완전히 텅 빈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로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며 열심히 노력하여 그것을 소모시켜서 텅 비워버린 것이다. 어떻게 고생하고, 어떤 식으로 소모시켜 왔는지는 여기에다 일일이 쓰지 않겠다. 귀챦기 때문이다. 그래도 꼭 알고 싶은 사람은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를 읽어주기 바란다. 거기 전부 씌여 있다. 

 

어떤 신문 기자가 인터뷰 중에 하트필드에게 물었다. "당신 소설의 주인공 월드는 화성에서 두 번 죽고, 금성에서 한 번 죽었습니다. 이건 모순 아닙니까?" 하트필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는 우주 공간에서 시간이 어떤 식으로 흐르는지 알고 있나?" "아뇨,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도 모릅니다." 기자의 말에 하트필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걸 소설에 쓴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결국 작가는 인생에 대해서 신비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 같다. 알려고 하지도 말고, 해답도 없다는 자세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인생은 물음없이 가는 길이라고나 할까. 


바람이 그에게 속삭였다. "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바람이니까. 만일 자네가 화성인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아. 나쁜 느낌은 아니니까. 하긴, 말 따윈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렇지만 말하고 있쟎아."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자네지. 나는 자네의 마음에 힌트를 주고 있을 뿐이야. "       

"태양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늙었어. 죽어가고 있지. 나도 자네도 어쩔 수가 없다구. "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자네가 우물을 빠져나오는 동안에 약15억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 자네들의 속담에도 있듯이 세월은 화살과 같다구. 자네가 빠져나온 우물은 시간의 일그러짐에 따라서 파진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 셈이지. 우주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말이야. 그렇게 때문에 우리에게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어. 그냥 바람이지."


<작가의 말> 중에서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사이에, 정직하게 쓰려고 하면 할수록 정직하지 않은 문장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장을 문학 언어적으로 복잡화, 심화시키면 시킬수록, 거기에 담기는 생각이 부정확해지는 것이었다. 요컨대 나는 언어의 이차적 언어성에 의존하여 문장을 썼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피츠제럴드는 "타인과 다른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서"라고 어느 편지에 썼다. 

"타인과 다른 언어로 얘기하라."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곧잘 그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타인과는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언어로. 

나는 좀더 심플하게 쓰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하게.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그 후 레이먼드 카버를 번역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것도 나와 같은 시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능한 한 문장을 심플하게 하기 위해, 나는 실험적으로 처음 몇 페이지를 영어로 써보았다. 물론 나의 영어 실력이야 뻔한 것이다. 고등학생의 영작문정도로 치졸한 것이다. 하지만 쓰고자 하면 정말 기초적인 심플한 어휘만으로도 문장을 쓸 수 있다는 발견은, 내게 큰 수확이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테제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테제로 성립하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렇지,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제법 문장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게 그 점은 매우 신선한 발견이었다. 

'책이 좋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은 병이 아니다  (0) 2022.02.03
청소력  (0) 2021.10.19
Man's search for meaning  (0) 2021.10.15
당신이 옳다  (0) 2021.10.13
패배를 딛고 승리하는 법 (Feat. Rafa)  (0) 2021.09.26